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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활성 주제/희*독서

독서메모 l 은희경- 타인에게 말걸기

by 시위엔🌰 202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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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내 머릿속에 들어차 있던, 왜 내가 이곳에 왔는지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과 후회를 더욱 강력한 것으로 만들어주면서.

 내 등뒤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내일 또 올 거지?"

"뭐?"

 

 내 목소리에 충분한 짜증이 섞여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명랑했다.

오히려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깔깔 웃었다.

 

"그때 말야."

 그녀의 검은 눈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산부인과에 따라가달라고 처음 찾아갔을 때, 왜 하필 너였는지 알아?"

"왜 그랬는데."

"네가 친절한 사람 같지 않아서야."

"... ..."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어."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를 더듬다가 나는 그녀가 잘 관찰했듯 대부분의 남자들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담배를 넣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만약에 병원에 따라가준다 해도 너한테라면 신세진 느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의 비밀을 안 뒤에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정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게 보였기 때문이야."

"... ..."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이야.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는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불을 붙이려던 나는 이곳이 병실 안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고 담배를 도로 담뱃갑 안에 집어 넣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제보니 그녀의 벌어진 눈 속은 꽤 깊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그렇게 냉정하게 살 수 있는 거지? 사실은 너도 겁이 나서 피해버리는 거 아냐?"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서 뺨 위의 흉터가 함께 끌려다니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흉터는 몇억 년 전의 사암 속에서 발견된 연체동물의 화석처럼 이미 사라져버린 삶의 어렴풋한 흔적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치었다는 택시가 사력을 다해 급정거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녀가 원했던 죽음과 절망을 유보해 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따. 어쨌든 그 택시 운전사도 나처럼 그녀를 만나서 일진이 나빴던 것만은 틀림없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끊어지려는 순간 송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저쪽에서는 깔깔대는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점을 쳐볼 필요도 없이 역시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소리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의 습관대로 먼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며 나는 샤워바스가 엎질러져 있지 않은지 타월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젖어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폴로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냄비에 정량의 물을 붓고 조심해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냉장고에서 저칼로리 우동을 꺼내 봉지를 찢을 때도 성급히 귀퉁이를 크게 찢어서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생각해보니 전화 속의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끓는 물 속에 액상스프를 넣었다. 내가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일까.

 

 냄비 안의 우동 스프가 뭔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간장색이 배어나오기 시작해야 하는데 건조된 파 부스러기가 둥둥 떠다녔다. 액상스프가 아닌 분말스프를 먼저 넣은 것이다.

 

 나쁘게 정해진 일을 피할 수 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언제나 내 머릿속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말이 떠오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는 단조로움을 원한다.

 


 

그 동안 개를 좋아하지도 않고 키워본 적도 없었으므로 그녀는 개에 관해 아무런 견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개를 알듯도 싶었다.

개는 주인이 매일같이 귀여워하다가 갑자기 걷어차더라도

오랫동안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다.

그 일의 심각성에 대해 10분이상 고민할 만큼 진지하지도 않다.

다음날이면 또 와서 꼬리를 친다.

 왜 부당하게 걷어차여야 하냐고 항변하거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으며,

걷어차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태업을 하거나 단식을 하지도 않는다.

 언제든지 주인의 발밑에 엎드려 있다가 불러주는 순간 감격하여 달려가는게 개이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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